책장 한쪽에 몇 년째 꽂혀만 있던 영어 원서가 있었습니다.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 영화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개봉 전에는 원서로 읽어야지” 하고 꺼냈다가, 첫 챕터 중간쯤에서 모르는 단어가 한 페이지에 열 개씩 나오는 순간 조용히 다시 꽂아두기를 세 번쯤 반복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방식을 바꿔서 AI 챗봇을 옆에 켜두고 읽어봤고, 처음으로 끝까지 읽었습니다. 사전 앱만 쓰던 때와 무엇이 달랐는지 적어두려고 합니다.
사전 앱으로 읽을 때 매번 막혔던 지점
예전에는 휴대폰 사전 앱을 옆에 두고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검색했습니다. 문제는 단어 뜻을 알아도 문장이 안 읽힌다는 거였어요. 이 소설은 주인공이 과학 교사 출신이라 말투가 가볍고 농담이 많은데, 관용구나 말장난이 섞이면 사전에 나온 첫 번째 뜻을 대입해도 전혀 말이 안 됐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세 번째 뜻까지 뒤지다가 결국 앞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한 페이지에 십오 분씩 걸리면 흥미가 남아날 수가 없죠.
또 하나는 과학 용어였습니다. 단어 자체는 사전에 있지만 “그래서 이게 왜 중요한데?”가 안 잡히니 줄거리의 긴장감이 전달되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뭔가를 계산하고 놀라는 장면에서 저만 혼자 멀뚱히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AI에게 물어본 방식
이번에는 종이책을 읽다가 막히는 문장을 휴대폰으로 직접 타이핑해서 챗GPT와 클로드에 번갈아 물어봤습니다. 처음엔 “이 문장 번역해줘”라고만 했는데, 그러면 매끄러운 한국어 번역문이 나오긴 하지만 제가 영어로 읽고 있다는 의미가 사라지더라고요. 번역문만 보고 넘어가니 다음 페이지에서 비슷한 구조가 또 나와도 똑같이 막혔습니다.
사흘쯤 지나서 질문을 바꿨습니다. “번역하지 말고, 이 문장에서 내가 헷갈릴 만한 표현이 뭔지 짚어주고 뉘앙스만 설명해줘.” 이렇게 물으니 답이 확 달라졌어요. 어떤 표현이 구어체 농담인지, 주인공이 지금 비꼬는 건지 진짜 감탄하는 건지, 이 단어가 과학 용어로는 어떤 의미인지 같은 걸 알려주고 해석은 제 몫으로 남겨두니, 읽는 재미가 살아났습니다. 저는 이 한 줄짜리 요청을 메모장에 저장해두고 매번 붙여넣어 썼습니다.
사전 앱보다 확실히 나았던 점
문맥을 같이 봐준다
가장 큰 차이는 이거였습니다. 앞뒤 문장을 같이 붙여넣으면 “여기서는 이 뜻”이라고 콕 집어줍니다. 사전 앱이 뜻 목록을 주고 고르는 건 제 몫이었다면, AI는 고르는 과정까지 도와주는 셈이에요. 말장난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왜 웃긴 건지까지 설명해줘서, 설명을 듣고 나서야 피식 웃는 좀 민망한 경험도 여러 번 했습니다.
배경지식을 짧게 채워준다
과학 설정이 나오는 장면에서 “고등학생 수준으로 두세 문장만”이라고 조건을 걸어 물어보면, 딱 이야기를 따라갈 만큼만 알려줬습니다. 길게 늘어놓는 답이 오면 오히려 책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분량 제한은 꼭 거는 게 좋았어요. 이렇게 하고 나니 주인공이 놀라는 장면에서 저도 같이 놀랄 수 있게 됐습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건 결국 이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조심해야 했던 점
좋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한 번은 등장인물 이름과 이전 사건을 섞어서 설명한 적이 있어요. 제가 붙여넣은 문장만으로는 알 수 없는 줄거리를 AI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지어낸 거였는데, 하마터면 뒷부분 내용을 잘못 짐작한 채로 읽을 뻔했습니다. 그 뒤로는 “내가 준 문장 안에서만 설명해줘, 줄거리 추측은 하지 마”를 요청문에 추가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는 효과도 덤으로 있었고요.
또 하나, 너무 편하다 보니 조금만 막혀도 바로 물어보게 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중반쯤부터는 “한 페이지에 최대 세 번만 묻기”라는 규칙을 스스로 정했어요. 그러자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일단 문맥으로 짐작하고 넘어가는 힘이 조금씩 붙었습니다. 원서를 읽는 목적이 결국 영어를 영어로 읽는 거라면, AI는 목발 정도로만 쓰는 게 맞다고 느꼈습니다.
완독까지 걸린 시간과 달라진 것
출퇴근 지하철과 자기 전 삼십 분 정도를 모아서 대략 3주 반이 걸렸습니다. 첫 주에는 하루 열 페이지도 버거웠는데, 마지막 주에는 AI를 거의 안 켜고 하루 사오십 페이지씩 읽혔어요. 후반부가 워낙 재미있기도 했지만, 초반에 모르는 표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간 덕에 같은 표현이 다시 나올 때 막히지 않았던 게 컸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솔직히 좀 울컥했습니다. 세 번 포기한 책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혹시 비슷하게 원서를 꽂아만 두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제가 최종적으로 쓴 요청문을 공유합니다. 필요한 만큼 고쳐서 쓰시면 됩니다.
- 번역하지 말고, 헷갈릴 만한 표현과 뉘앙스만 짚어줘
- 과학·배경 설명은 고등학생 수준으로 두세 문장만
- 내가 준 문장 안에서만 설명하고, 줄거리 추측은 하지 마
- (스스로에게) 한 페이지에 최대 세 번만 묻기
다음 책은 조금 더 문장이 까다로운 소설로 골라볼 생각입니다. 그때는 AI를 얼마나 덜 켜고 읽을 수 있을지, 그게 이번 실험의 진짜 성적표가 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