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가족끼리 2박 3일로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출발 전날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서 그냥 AI 챗봇한테 “가을 강릉 2박 3일, 어른 둘 아이 하나, 자동차 이동. 짐 체크리스트 만들어줘”라고 던졌습니다. 30초도 안 돼서 옷, 세면도구, 전자기기, 상비약, 서류까지 카테고리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목록이 나왔고, 솔직히 그때는 “이제 짐 싸기는 끝났다” 싶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목록 자체는 꽤 쓸 만했지만, 현지에 도착해서 “아 이거 없네” 하고 편의점을 찾아 헤맨 게 세 번이었습니다. 돌아와서 왜 그 세 가지가 빠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AI가 틀렸다기보다 제가 질문에 넣지 않은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글은 그 세 가지와, 다음 여행 때 질문을 어떻게 바꿨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처음 받은 체크리스트는 이랬습니다
목록은 대략 마흔 개 항목이었습니다. 가을이라 일교차가 크다며 얇은 겉옷과 경량 패딩을 넣어줬고, 바닷가니까 여벌 신발과 비닐봉지를 챙기라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아이용으로는 물티슈, 간식, 차에서 볼 태블릿과 이어폰까지 들어가 있었어요. 이 정도면 제가 직접 썼을 때보다 오히려 촘촘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경량 패딩은 분명히 빼먹었을 거고, 실제로 둘째 날 저녁 경포 해변에서 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그 패딩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문제는 목록이 “일반적인 가족 여행”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가족만의 사정은 하나도 반영돼 있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알려준 게 없었으니까요.
빠진 것 하나: 멀티탭과 긴 충전 케이블
체크리스트에는 “휴대폰 충전기”가 있었고 저는 충전기 두 개를 챙겼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콘센트가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벽에 딱 하나 있었습니다. 휴대폰 세 대, 태블릿, 아이 카메라까지 다섯 개를 한 구멍으로 돌려가며 충전하느라 밤새 두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그 새벽의 짜증은 지금 생각해도 좀 우습습니다.
AI는 우리 집에 충전할 기기가 몇 개인지, 숙소가 오래된 펜션인지 신축 호텔인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똑같은 질문에 “충전이 필요한 기기 다섯 대, 숙소는 지은 지 오래된 펜션”이라는 조건을 덧붙였더니, 이번에는 멀티탭과 2미터 이상 케이블을 첫 줄 가까이에 올려주더군요.
빠진 것 둘: 아이가 평소 쓰는 물건
아이는 잘 때 꼭 끼고 자는 작은 담요가 있습니다. 여행 첫날 밤, 불을 끄고 나서야 그 담요가 집 소파 위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국 수건 두 장을 돌돌 말아서 겨우 달랬는데, 그날 아이가 잠들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체크리스트에는 “아이 잠옷”은 있었지만 이런 애착 물건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이건 AI에게 물어봐서 해결될 문제라기보다 제가 미리 정보를 줘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질문할 때 “아이가 매일 쓰는 물건: 담요, 전용 컵, 좋아하는 책 한 권”처럼 아예 고정 항목을 같이 붙여 넣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AI가 그걸 목록 안에 자연스럽게 넣어주고, 저는 하나하나 체크만 하면 됩니다.
빠진 것 셋: 현지 일정에 따른 준비물
둘째 날 오전에 근처 계곡 쪽 산책로를 걷기로 했는데, 체크리스트에는 운동화만 있고 벌레 기피제나 모자는 없었습니다. 10월이라 모기는 없겠지 했는데, 숲길에 들어가니 작은 날벌레가 계속 얼굴로 달려들었습니다. 아이는 반쯤 울상이 됐고 산책은 예정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처음 질문에는 “강릉”이라는 지역만 있었지 무엇을 할지는 없었습니다. AI 입장에서는 바다 위주의 여행이라고 짐작했을 테고, 실제로 목록도 해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여행부터는 날짜별 일정을 한 줄씩 적어서 함께 붙여 넣습니다. “1일차 오후 해변 산책, 2일차 오전 숲길 1시간, 오후 시장 구경” 정도만 적어도 결과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꿨더니 훨씬 나아졌습니다
강릉에서 돌아오고 2주 뒤, 부모님과 함께 1박 2일로 근교 캠핑장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길게 썼습니다. 인원과 나이, 이동 수단, 숙소 형태, 날짜별 일정, 충전할 기기 수, 아이가 매일 쓰는 물건, 그리고 “지난번에 빠뜨린 것: 멀티탭, 담요, 벌레 기피제”까지 넣었습니다. 쓰는 데 5분쯤 걸렸지만 목록 품질은 비교가 안 됐습니다. 캠핑장 개수대가 멀 수 있으니 설거지통을 챙기라거나, 밤 기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질 수 있으니 핫팩을 넣으라는 식으로 상황에 딱 맞는 항목이 섞여 나왔습니다.
한 가지 더 해본 건, 목록을 받은 뒤 “이 중에서 현지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눠줘”라고 다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짐이 넘칠 때 무엇을 빼도 되는지가 바로 보여서, 트렁크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꽤 줄었습니다. 물티슈나 생수는 현지 조달 쪽으로, 아이 상비약과 담요는 무조건 챙길 쪽으로 분류되는 식입니다.
다음 여행 때 쓸 질문 틀
결국 AI 체크리스트의 품질은 제가 얼마나 우리 집 사정을 털어놓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요즘은 메모 앱에 아래 항목을 저장해두고 여행 때마다 빈칸만 채워서 붙여 넣습니다.
- 인원, 나이, 이동 수단, 숙소 형태
- 날짜별 일정 한 줄씩 (실내/실외, 바다/산)
- 충전이 필요한 기기 개수
- 가족이 매일 쓰는 고정 물건 (애착 담요, 복용 중인 약 등)
- 지난 여행에서 빠뜨렸던 것
이렇게 해도 완벽하진 않습니다. 이번 캠핑 때는 결국 집게를 하나 빠뜨려서 옆 텐트에서 빌렸거든요. 그래도 “편의점 세 번”이 “옆 텐트에 한 번”으로 줄었으니, 제 기준으로는 꽤 큰 발전입니다. 짐 싸는 걸 유난히 미루는 분이라면, 출발 전날 밤 AI에게 목록을 맡기더라도 우리 집만의 사정 다섯 줄은 꼭 같이 적어 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