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드립을 시작한 지는 1년 반쯤 됐습니다. 처음 샀던 원두를 다 마실 때까지는 그럭저럭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로 산 에티오피아 원두에서 막혔어요. 봉투에 적힌 설명은 “자스민, 복숭아, 홍차 같은 여운”이었는데 제가 내린 커피에서는 시큼한 신맛만 혀끝을 찌르고 금방 사라졌습니다. 같은 원두를 카페에서 마셨을 땐 분명 달큰했으니 원두 탓은 아니었고요.
유튜브에서 바리스타들 레시피를 몇 개 따라 해봤지만, 영상마다 분쇄도·물 온도·붓는 횟수가 다 달라서 오히려 더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AI 챗봇을 옆에 두고 매일 아침 한 잔씩 내리면서 맛을 보고하고, 다음 날 레시피를 한 가지씩만 바꿔보는 식으로 2주를 보내봤어요. 결과적으로 원하던 맛에 꽤 가까워졌고, 그 과정에서 AI를 어떻게 써야 도움이 되는지도 조금 알게 됐습니다.
“맛있게 내리는 법”을 물었을 때 생긴 일
첫날은 별생각 없이 “에티오피아 원두 핸드드립 맛있게 내리는 법 알려줘”라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원두 15g에 물 250g 안팎, 물 온도 90~93도, 30초 뜸 들이기, 총 추출 시간 2분 30초~3분 정도라는, 검색하면 어디서나 나오는 표준 레시피였어요. 틀린 건 없었지만 문제는 제가 이미 거의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미 하고 있는 방법을 다시 알려주니 바꿀 게 없었죠.
식물 상담할 때도 비슷한 걸 겪었는데, AI는 제 상황을 모르면 평균적인 답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날부터는 질문 방식을 아예 바꿨어요. 레시피를 달라고 하지 않고, 제가 지금 쓰는 레시피와 그 결과로 나온 맛을 먼저 적은 다음 “뭘 하나만 바꿔본다면 뭐가 좋을까”라고 묻기로 했습니다.
맛 일지를 적고 하나씩만 바꾸기
매일 아침 메모 앱에 원두 양, 그라인더 눈금, 물 온도, 붓는 횟수, 총 추출 시간, 그리고 맛을 적었습니다. 맛은 처음엔 “시다”, “밍밍하다” 정도밖에 못 썼는데, AI가 “신맛이 날카롭게 찌르고 바로 사라지는지, 아니면 과일처럼 둥글게 남는지” 같은 식으로 되물어주면서 표현이 조금씩 늘었어요. 이게 생각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냥 “시다”라고만 쓰면 원인이 너무 많아지는데, “찌르고 금방 사라지는 신맛, 뒷맛이 얇음”이라고 쓰니까 AI가 덜 추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꽤 자신 있게 짚더라고요.
3~5일차: 분쇄도만 조금씩 곱게
AI가 처음 제안한 건 분쇄도였습니다. 물 온도도 같이 올려볼까 물었더니 두 개를 동시에 바꾸면 뭐 때문에 맛이 변했는지 모르게 되니 하나씩만 바꾸자고 하더군요. 당연한 얘기인데 혼자 할 땐 늘 서너 개를 한꺼번에 바꿨던 터라 좀 찔렸습니다. 그라인더를 한 칸씩 곱게 조정했더니 추출 시간이 2분 10초에서 2분 40초쯤으로 늘었고, 날카로운 신맛이 확실히 누그러졌어요. 다만 5일차에 한 칸 더 곱게 했더니 이번엔 끝맛에 텁텁한 쓴맛이 올라와서 하루 만에 다시 되돌렸습니다.
6~9일차: 물 온도와 붓는 방식
분쇄도를 고정한 뒤에는 물 온도를 올렸습니다. 원래는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잠깐 식혀서 대충 쓰고 있었는데, 온도계를 꽂아보니 붓는 시점에는 이미 85도 근처까지 떨어져 있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낮아서 좀 놀랐습니다. 밝게 볶은 원두는 조금 높은 온도가 잘 맞는 편이라고 해서 93도 정도로 맞췄더니 단맛이 처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물을 한 번에 길게 붓던 걸 세 번에 나눠 붓는 방식으로 바꿔봤는데, 이건 솔직히 큰 차이를 모르겠더라고요. AI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붓기 방식은 체감 차이가 작을 수 있으니 편한 쪽으로 해도 된다고 해서 그냥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10~14일차: 원두 양 조절과 마무리
마지막으로 원두를 15g에서 16g으로 늘리고 물은 그대로 뒀습니다. 단맛은 좋아졌는데 바디감이 좀 가볍다고 쓴 날 나온 제안이었어요. 12일차쯤 아침에 한 모금 마셨을 때 카페에서 마셨던 그 복숭아 같은 단맛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는데, 그 순간 혼자 부엌에서 “어, 이거다” 하고 소리를 냈습니다. 2주 동안 매일 아침 10분씩 투자한 게 보상받는 기분이었어요.
AI가 도움 됐던 부분과 아닌 부분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맛 표현을 원인으로 연결해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막연하게 쓴 감상을 “덜 추출”, “과추출” 같은 방향으로 정리해주고, 그 방향에 맞춰 다음에 바꿀 변수를 하나만 골라주니까 실험이 흩어지지 않았어요. 혼자 했으면 아마 사흘쯤 하다가 “이 원두는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포기했을 겁니다.
반대로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AI는 제 커피를 마셔볼 수 없으니, 결국 맛을 판단하는 건 제 혀였어요. 제가 맛을 잘못 표현하면 제안도 엉뚱하게 갔습니다. 7일차에 “쓰다”고 적었다가 AI가 분쇄도를 굵게 하자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쓴맛이 아니라 식으면서 올라온 떫은맛에 가까웠거든요. 그리고 그라인더 눈금 같은 장비별 차이는 AI도 일반론밖에 말해주지 못해서, “한 칸”이 얼마만큼의 변화인지는 직접 마셔보면서 감을 잡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 대화가 길어지니 초반에 적었던 조건을 AI가 가끔 헷갈려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째부터는 매번 질문할 때 “현재 레시피: 16g / 250g / 93도 / 그라인더 X칸 / 2분 40초”처럼 지금 상태를 맨 위에 다시 붙여 넣었어요. 번거롭긴 해도 이렇게 하니 엉뚱한 답이 확 줄었습니다.
비슷하게 해보실 분들께
홈카페 장비가 대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저울, 수동 그라인더, 드리퍼, 그리고 이번에 새로 산 만 원짜리 요리용 온도계가 전부예요. 다만 2주 해보고 나니 아래 몇 가지는 꼭 챙기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레시피를 묻기 전에 지금 쓰는 레시피와 맛을 먼저 적어서 보여주기
- 한 번에 변수는 하나만 바꾸기
- 맛은 “시다/쓰다”보다 “어떻게” 시고 쓴지까지 구체적으로 적기
- 질문할 때마다 현재 레시피를 맨 위에 다시 붙여 넣기
- 물 온도는 감 대신 온도계로 한 번은 확인해보기
지금은 같은 원두 두 번째 봉투를 뜯었는데, 로스팅 날짜가 달라서인지 또 미묘하게 맛이 달라졌습니다. 아마 다음 2주도 비슷하게 일지를 쓰면서 보내게 될 것 같아요. 정답을 받아 적는 것보다 하나씩 바꿔가며 맛이 달라지는 걸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생각보다 재밌었다는 게, 이번 실험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