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오래된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어떤 쇼핑몰에서 온 “비밀번호가 변경되었습니다”라는 5년 전 메일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비밀번호, 지금도 다른 사이트 서너 곳에서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때부터 며칠간 붙잡고 있던 “비밀번호 대청소” 작업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계기가 된 건 사소한 알림 하나였다
브라우저 자체 비밀번호 관리 기능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비밀번호가 데이터 유출에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가 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목록을 눌러보니 경고가 뜬 계정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에는 자주 안 쓰는 커뮤니티 계정도 있었지만,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저장소처럼 정말 뚫리면 곤란한 계정도 섞여 있었다. 문제는 그 계정들이 전부 비슷한 패턴의 비밀번호를 쓰고 있었다는 거다. 뒤에 숫자만 바꾼다거나, 특수문자 하나만 다르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러면 하나가 뚫리면 사실상 도미노처럼 다 뚫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미뤄왔던 셈이다.
AI한테 무작정 다 맡길 순 없더라
처음엔 “AI가 알아서 안전한 비밀번호를 만들어주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챗봇을 열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AI가 내 실제 계정에 접근해서 비밀번호를 바꿔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한 건데도 왜 그 순간엔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대신 AI는 계정을 위험도별로 분류하는 기준을 세우는 데는 꽤 쓸모가 있었다. 금융이나 이메일처럼 뚫리면 치명적인 계정, 자주 로그인하는 일상 서비스, 거의 안 쓰지만 남아있는 휴면 계정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다른 전략을 쓰라고 제안해줬다. 말은 쉬운데 실제로 내가 쓰는 계정을 하나씩 떠올려서 저 세 칸에 분류하는 작업 자체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어림잡아 40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두 시간 가까이 걸렸고, 그 두 시간이 체감상 반나절처럼 느껴졌다.
긴 문장형 비밀번호, 말은 쉬워도 사이트마다 규칙이 다 다르다
요즘은 짧고 복잡한 비밀번호보다 기억하기 쉬운 긴 문장형 조합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AI한테 관련 없는 단어 서너 개를 엮어서 문장처럼 만드는 방식을 몇 가지 제안받았는데, 실제로 적용하려니 예상 못한 벽에 부딪혔다. 어떤 사이트는 비밀번호 길이를 16자로 제한해두고 있었고, 또 어떤 은행 사이트는 특수문자를 딱 정해진 몇 개만 허용해서 내가 만든 조합을 통째로 다시 손봐야 했다. 결국 완전히 똑같은 패턴을 모든 곳에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큰 틀만 유지한 채 사이트별 제약에 맞춰 조금씩 변형하는 쪽으로 타협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 만든 비밀번호를 어딘가에 적어두긴 해야 하는데, 그걸 메모 앱에 평문으로 적어두는 게 찜찜해서 결국 비밀번호 관리 프로그램을 하나 새로 설치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처음 계획엔 없던 일인데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이메일과 클라우드부터 먼저 바꾼 이유
모든 계정을 하루 만에 다 바꾸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래서 순서를 정했는데, 이메일 계정을 가장 먼저 손댔다. 이메일이 뚫리면 거기 연결된 다른 서비스의 비밀번호 재설정 메일도 같이 털릴 수 있어서, 사실상 모든 계정의 시작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는 클라우드 저장소, 그 다음은 자주 쓰는 결제 관련 서비스 순으로 넘어갔다. 다 바꾸고 나니 이틀 정도가 지나 있었는데, 그 사이에 예전 비밀번호로 로그인 시도가 있었다는 알림을 이메일에서 하나 받았다. 실제로 위험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봇이 무작위로 두드려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알림을 받으니 미루지 않고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지금 정리해보면 이렇게 하는 게 나았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진행했으면 시간을 훨씬 아꼈을 것 같다. 마무리 삼아 실제로 도움이 됐던 순서만 간단히 정리해둔다.
- 이메일, 클라우드처럼 다른 계정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부터 먼저 바꾸기
- AI에게는 실제 계정 접근이 아니라 분류 기준과 비밀번호 조합 아이디어만 물어보기
- 새 비밀번호는 메모 앱 평문 대신 별도 관리 프로그램에 저장하기
- 사이트별 글자 수·특수문자 제한을 미리 확인해서 다시 만드는 수고 줄이기
여전히 다 바꾸지 못한 휴면 계정이 몇 개 남아있긴 하다. 급한 불부터 껐다는 느낌이라, 조만간 나머지도 정리할 생각이다. 비슷하게 오래 묵혀둔 비밀번호가 있다면, 전부 한 번에 손대려 하기보다 위험도가 높은 계정부터 순서대로 정리하는 쪽을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