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대학 동기 셋이 집에 놀러 왔습니다. 저녁 먹고 나서 뭘 할까 하다가 선반 위에 먼지 쌓여 있던 카탄을 꺼냈는데, 문제는 저 말고 아무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저도 마지막으로 한 게 2년 전이라 규칙이 가물가물했고요.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룰북을 펴놓고 설명하다가 30분이 그냥 지나가고, 막상 게임을 시작할 때쯤엔 다들 지쳐서 “그냥 하면서 배우자”로 끝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보고 싶어서, 친구들이 오기 전에 AI에게 룰 설명 대본을 미리 만들어달라고 해봤습니다.
결과적으로 설명은 12분 정도에 끝났고, 첫 판은 다들 웃으면서 끝까지 갔습니다. 다만 AI가 처음 준 대본을 그대로 쓴 건 아니고, 두 번 정도 고친 다음에야 쓸 만해졌어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요령을 적어둡니다. 카탄 말고 다른 보드게임에도 그대로 써먹을 수 있는 방식이라, 모임에서 늘 룰 설명 담당이 되는 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받은 요약본은 룰북 축소판이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카탄 규칙을 초보자에게 설명할 수 있게 요약해줘”라고만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꽤 길었어요. 게임 구성물 소개부터 시작해서 초기 배치, 자원 생산, 거래, 건설 비용, 도둑, 발전 카드, 최장 교역로와 최대 기사단까지 룰북 목차 순서 그대로 정리돼 있었습니다. 틀린 내용은 거의 없었는데, 소리 내서 읽어보니 7분이 넘게 걸렸고 중간에 제가 먼저 지루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룰북은 빠짐없이 적는 게 목적인 문서고, 그걸 줄이기만 하면 “조금 짧은 룰북”이 될 뿐이죠. 처음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모든 규칙이 아니라 첫 턴을 둘 수 있을 만큼의 규칙입니다. 발전 카드 다섯 종류의 효과를 시작 전에 다 외울 필요는 없어요. 처음 뽑았을 때 설명해주면 그만이니까요.
질문을 바꾸니 대본이 달라졌다
그래서 두 번째에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붙였습니다. “보드게임을 거의 안 해본 성인 세 명에게 설명할 거야. 시작 전 설명은 10분 이내로 하고 싶어. 이기는 조건을 맨 먼저 말하고, 첫 턴에 꼭 필요한 규칙만 넣고, 나머지는 게임 중에 처음 등장할 때 설명할 목록으로 따로 빼줘.” 이렇게 바꾸니 답의 모양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새 대본은 “먼저 10점을 모으는 사람이 이깁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했어요. 그다음이 점수를 얻는 방법(마을 1점, 도시 2점), 그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원, 자원이 들어오는 방식(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온 숫자의 땅에 붙은 사람이 받는다) 순서였습니다. 목표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구조라서 듣는 사람이 “그래서 내가 지금 뭘 해야 하지?”를 계속 따라올 수 있었습니다. 발전 카드, 항구 거래, 최장 교역로 같은 건 “나오면 설명할 것” 목록으로 빠졌고요.
7이 나왔을 때만은 미리 말해야 했다
한 가지는 제가 직접 고쳤습니다. AI는 도둑 규칙을 “나오면 설명할 것” 목록에 넣었는데, 이건 미리 말해두는 게 맞다고 판단했어요. 주사위 합이 7이면 손에 든 자원 카드가 일곱 장을 넘는 사람은 절반을 버려야 하거든요. 이걸 모르고 카드를 잔뜩 쥐고 있다가 갑자기 버리라고 하면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2년 전에 그 일로 분위기가 싸해진 적이 있어서, 이번엔 대본 앞부분에 한 줄 넣었습니다. AI가 정리한 구조는 훌륭했지만, 사람들이 어디서 기분 상하는지는 제 경험이 더 정확했던 셈입니다.
실제 설명할 때 효과 있었던 것들
대본보다 더 효과가 컸던 건 AI가 덧붙인 진행 팁 하나였습니다. “첫 바퀴는 모든 패를 공개하고 같이 두면서 설명하라”는 거였어요. 저는 그냥 연습 라운드를 하라는 말로 받아들였는데,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각자 자기 차례에 “지금 나무랑 벽돌이 있으니 길을 놓을 수 있어” 하고 말로 확인하면서 두니까, 설명을 귀로 듣는 것보다 손으로 하는 쪽이 훨씬 빨리 머리에 들어가더라고요. 첫 바퀴가 끝나고 카드를 다시 뒤집어 들었을 때는 다들 건설 비용표를 거의 안 보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건설 비용 카드를 각자 앞에 한 장씩 두게 한 것입니다. 이건 원래 게임에 들어 있는 구성물인데, 예전엔 귀찮아서 가운데 한 장만 놓고 했었어요. AI 대본에 “참고 카드를 각자 앞에 두라”는 말이 있길래 그대로 했더니 “도시 짓는 데 뭐가 필요했지?” 같은 질문이 확 줄었습니다. 사소한 건데, 설명하는 사람 입장에선 같은 질문에 다섯 번 답하지 않아도 되는 게 꽤 컸습니다.
AI 요약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순간
물론 다 매끄러웠던 건 아닙니다. 게임 중간에 친구 하나가 항구로 교환을 하려는데, AI가 “나오면 설명할 것” 목록에 적어둔 항구 규칙이 제 기억과 조금 달랐어요. 일반 항구는 같은 자원 세 장을 아무 자원 한 장으로, 특수 항구는 지정된 자원 두 장을 한 장으로 바꾸는 건데, 대본에는 특수 항구 설명이 애매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결국 룰북을 펴서 확인했고, 1분 정도 게임이 멈췄습니다.
이 일로 확실해진 건, AI 요약은 “설명 순서와 말투”를 잡는 데는 아주 좋지만 세부 규칙의 정확성까지 맡기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확장판이나 개정판이 여러 개 있는 게임일수록 판본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라서, AI가 섞어서 답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대본을 받으면 숫자가 들어간 문장(몇 장, 몇 점, 몇 칸)만 골라서 룰북과 한 번씩 대조합니다. 5분이면 끝나는 일인데, 게임 도중에 분위기 깨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다음 모임 전에 쓸 질문 틀
이번에 써본 질문을 다른 게임에도 쓸 수 있게 틀로 정리해 뒀습니다. 다음 달에 처음 해보는 협력 게임을 들고 갈 예정이라, 그때도 이대로 해볼 생각이에요.
- 누구에게 설명하는지(인원, 보드게임 경험 정도)를 먼저 적는다
- 시작 전 설명 시간을 숫자로 못 박는다(예: 10분 이내)
- 이기는 조건을 첫 문장으로, 첫 턴에 필요한 규칙만 본문에 넣으라고 한다
- 나머지 규칙은 “처음 나올 때 설명할 목록”으로 따로 받는다
- 억울함이 생기기 쉬운 규칙(카드 버리기, 공격 등)은 직접 골라 앞쪽으로 옮긴다
- 숫자가 들어간 규칙은 룰북과 직접 대조한다
그날 첫 판은 보드게임을 처음 해본 친구가 이겼습니다. 설명한 사람이 지는 게 이 바닥의 국룰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꽤 분했어요. 그래도 끝나자마자 “한 판 더”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이번 룰 설명은 성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