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AI로 정리하다 손으로 돌아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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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꼭 뭔가 남겨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트를 펴면 귀찮아서 미루고, 한 달쯤 지나면 그 책에서 뭐가 좋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올여름에 그 문제를 AI로 해결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밑줄 친 문장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요약과 핵심 문장 정리를 맡기면 되겠다는 단순한 계산이었죠.

두 달 동안 책 다섯 권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처음 2주는 정말 편했고, 솔직히 감탄도 했어요. 그런데 9월 말쯤 그 기록들을 다시 열어봤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리는 깔끔한데, 그 안에 제가 없었거든요. 결국 지금은 절반쯤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부분은 AI가 계속 맡고, 어떤 부분은 제가 다시 가져온 셈인데, 그 경계가 어디였는지를 적어두려고 합니다.

처음 2주는 이게 정답인 줄 알았다

첫 책은 회사 동료가 추천해준 경제 교양서였습니다.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붙여둔 페이지가 스무 곳 정도 됐는데, 다 읽은 날 밤에 그 페이지들을 휴대폰으로 찍어서 한꺼번에 올렸어요. “밑줄 친 부분만 모아서 장별로 정리하고, 책 전체 주장을 다섯 줄로 요약해줘”라고 했더니 10분도 안 돼서 꽤 그럴듯한 독서 노트가 나왔습니다. 손으로 했으면 한 시간은 걸렸을 분량이었죠.

사진 속 문장을 옮겨 적는 정확도도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페이지가 휘어 있거나 형광펜이 번진 부분에서 한두 글자씩 틀리긴 했지만 다시 확인하면 되는 수준이었어요.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면서 “이제 독서 노트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노션에 책별 페이지를 만들어두고 결과물을 붙여넣으니, 겉보기엔 지금까지 만든 어떤 독서 기록보다 정돈돼 보였고요.

한 달 뒤에 다시 읽어보니 생긴 문제

문제를 알아챈 건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였습니다. 친구가 요즘 돈 공부를 시작했다길래 제가 읽은 그 경제서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정작 왜 좋았는지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집에 와서 노션 페이지를 열어봤더니 요약은 다 있었습니다. 다섯 줄 요약도, 장별 핵심 문장도. 그런데 그걸 읽어도 “아, 이 부분에서 내가 무릎을 쳤었지” 하는 감각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이 쓴 서평을 읽는 기분에 더 가까웠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이유는 두 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요약이 너무 공평했다는 점이에요. AI는 제가 밑줄 친 스무 곳을 거의 같은 무게로 다뤘는데, 실제로 제게 중요했던 건 그중 세 곳 정도였습니다. 특히 한 대목은 읽다가 책을 덮고 한참 창밖을 봤을 만큼 와닿았는데, 정리본에서는 다른 문장들 사이에 한 줄로 묻혀 있었어요. 다른 하나는 제 생각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원래 손으로 쓸 때는 문장 옆에 “우리 팀 회의랑 똑같네” 같은 쓸데없는 메모를 꼭 달았거든요. 지나고 보면 그 쓸데없는 메모가 기억을 붙잡아두는 고리였던 겁니다.

네 번째 책을 정리할 때는 일부러 “내 감상도 추측해서 넣어줘”라고 해봤는데, 이건 더 별로였습니다. 그럴듯한 감상이 붙긴 했지만 제가 한 생각이 아니니 오히려 기록이 더 낯설어지더라고요. 그 순간 꽤 허탈했습니다. 시간을 아끼려다 기록의 핵심을 통째로 맡겨버린 셈이었으니까요.

손으로 돌아온 부분, AI에 남겨둔 부분

그렇다고 AI를 완전히 끊은 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책부터는 역할을 나눴어요. 밑줄 친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즉 순수한 타이핑 작업은 계속 사진으로 맡깁니다. 이건 손으로 해봐야 손목만 아프고 남는 게 없더라고요. 대신 그중에서 진짜 중요한 문장 세 개를 고르는 일과, 그 옆에 제 생각을 한두 줄 붙이는 일은 직접 합니다. 노트에 펜으로 쓰고 나중에 사진을 찍어 붙이기도 하고, 귀찮은 날은 그냥 휴대폰 메모에 적어요. 형식은 상관없고, 고르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저라는 게 중요했습니다.

AI를 새로 쓰게 된 용도도 하나 생겼습니다. 제 메모를 다 쓴 다음에 “이 책에 대해 내가 놓쳤을 만한 반론이나 질문을 세 개만 던져줘”라고 묻는 거예요. 요약을 시키는 게 아니라 말을 걸게 하는 쪽입니다. 경제서를 다시 펼쳐서 이걸 해봤더니 “저자의 주장이 금리가 낮은 시기에만 성립하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덕분에 그 장을 다시 읽게 됐고 이번에는 제법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정리를 대신 받는 것보다, 생각할 거리를 받는 쪽이 제게는 훨씬 쓸모가 있었어요.

두 달 해보고 남은 기준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 방식은 전부 AI에 맡길 때보다 책 한 권당 20분쯤 더 걸립니다. 전부 손으로 할 때에 비하면 절반 정도고요. 그 20분이 아깝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 두 달이 걸린 셈입니다. 독서 기록의 목적이 “정리된 문서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 책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떠올릴 고리는 결국 제가 직접 만들어야 하더라고요.

비슷하게 독서 기록을 AI로 해보려는 분이 있다면, 저는 이렇게 나눠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 문장 옮겨 적기, 페이지 번호 정리 같은 단순 작업은 AI에 맡긴다
  • 어떤 문장이 중요한지 고르는 일은 직접 한다 (세 개 이하로)
  • 내 감상은 짧고 엉성해도 내가 쓴다, AI가 대신 쓴 감상은 넣지 않는다
  • 다 쓴 뒤에 AI에게 반론이나 질문을 받아 한 번 더 생각해본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에는 아직 포스트잇이 네 장밖에 안 붙어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많이 붙여야 잘 읽은 것 같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적게 붙이려고 해요. 나중에 그중 어느 문장을 고를지 미리 고민하게 되니까, 읽는 속도는 조금 느려졌지만 한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습니다. AI 덕분에 생긴 변화라고 하기엔 좀 역설적이지만, 그것도 이번 실험에서 얻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